안락사의 정의. (euthanasia)

안사술(安死術)이라고도 한다. 안락사에는 자연의 사기(死期)를 앞당기지 않는 경우와 앞당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종교 ·도덕 ·법률 등의 입장에서 논쟁되어 왔다.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여 T.모어의 《유토피아》와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家)의 사람들》에도 나타나 있다. 자연의 사기를 앞당기는 안락사에 대해서는 그것이 살인죄 또는 촉탁살인죄의 범죄를 구성하는지 어떤지가 논쟁되고 있다. ① 사기가 확실히 절박할 때 ② 심한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죽음 이외에는 그 고통을 제거할 방법이 없을 때 ③ 본인의 참뜻에 의한 동의가 있을 때 ④ 방법이 적당할 때 등을 조건으로 하여 범죄의 성립을 부정하는 입장과 형은 가볍게 하더라도 범죄는 성립한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법원에서의 판례(判例)의 입장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1994년 6월 네덜란드에서는 한 정신과 의사가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던 한 여인에게 치사량의 수면제를 주어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대법원에서는 의사에게 유죄가 인정되나 형은 선고하지 않은 예가 있다. 이는 ‘죽을 권리’에 관한 법률을 한계상황에 이른 정신병 환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판례로 남게 되어 안락사를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에까지 확대한 예라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다윈주(州)에서는 안락사를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법으로 허용하였다. 1995년 로마 교황은 안락사를, “모든 고통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그 자체로써 그리고 고의적으로 죽음을 가져오는 행위나 부작위”로 정의하고, 이를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규정한 바 있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安樂死에 代한 贊成論 과 反對論을 列擧하면서,
여러분의 생각은?                                    


안락사 허용 찬성론

아무리 현대의학기술이 발달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약이 대량생산된다하더라도 여전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전세계적으로 수백 가지가 넘고 문명이 발전될수록 더욱 강력해진 바이러스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아마겟돈이 도래하기 까진 불멸의 생이란 존재할 수 없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죽음으로 가는 고통을 덜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의사들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이러한 그들의 권리행사인 안락사에 대해 나는 여지없이 찬성할 수밖에 없고, 지금 이 글에서 함께 손을 들어주고자 한다.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생의 끝을 부여잡고 있는 환자들. 병원에서조차 고개를 저어버린 말기의 환자들. 죽지 못해 산다는 그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가족들은 물론 의사에게도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그들을 차가운 메스의 손이라며 은근히 비꼬지만 그들도 우리와 다를바 없이 가슴을 가진 인간들이다. 잭케보커언박사의 안락사 사건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언론지상이나 윤리학, 종교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평생 의사라는 이름으로 안락사 시킨 수십명의 마지막 순간들을 일일이 비디오 테잎에 담아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일이었다. 자신의 안락사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면 결국은 큰 희생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텐데도 떳떳이 밝히고 나선 그의 "용기"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나는 일말의 비판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생의 끝에 힘겹게 매달린 환자의 곁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그는 "인간"이다. 환자를 위한 마지막 주사바늘끝이 떨리던 그도 "인간"이었다. 안락사를 떳떳이 밝혀도 정직한 그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이런 정(情)과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내가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이다. 마약이라는 최악의 수단까지 동원하며 삶을 포기하는 환자들에게 안락사는 최후의,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안락사 반대론자들의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안락사는 하늘이 내려준 권리, 즉 천부인권을 어기는 살인행위라 주장한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 속에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권리를 빼앗는 것 또한 나는 인권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파산지경에 이른 환자의 가족들 또한 불안과 고통의 연속이다. 가족중 한사람을 제 의지로 죽여야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법을 쓰는 까닭은 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조금은, 아니 다분히 이론적이다.) 현시대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 중요한 것은 유교적 대의명분이 아닌 현실적 대응이다. 정신적 능력으로서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믿음으로서 신이 내려주신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는 종교신자가 아니고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현실속에 살고 있다. 모세의 지팡이로 바다가 갈리는 기적과 부처의 손끝하나로 불치의 병을 이겨낼 수 있는 전설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 앞에서 일그러져 가는 환자의 눈에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의사가 현실에서는 오히려 구세주로 보일 것이다.

신의 영역이라 하여 감히 침범할 수 없었던 생사의 선택권이 이젠 히포크라데스에게로 넘어왔다. 언제나 신(神)만큼 냉철하고 객관적 판단을 하기 어렵다고 의심스러워 하지만 대답없는 그들보다는 따뜻한 의사의 손이 시한부에겐 더 인간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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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허용 반대론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음이라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시간은 개인에 따라 빠르게 찾아 올 수도 있으며, 아주 늦게 찾아 올 수도 있다. 죽음의 시간은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인간이 예측할 수도 없다. 만약 개인이 그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합법적이라는 이름아래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안락사. 과연 그것은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의 유지인가? 살인의 방관인가? 안락사 문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가기 위해 몇 가지 안락사의 정의를 확실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안락사란 현대 의학상 치료의 가망이 전혀 없는 불치의 환자가 격렬한 육체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경우에 그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환자의 진지한 요청에 의해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안락사의 문자적 뜻은 회랍어의 eu (아름답게, 행복하게)와 thanatos(죽음)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 '행복하고 품위있는 죽음', '고통없는 빠른 죽음', '잠자는 것과 같은 평화로운 죽음', '깨끗한 죽음', '가벼운 죽음'.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또 안락사에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소극적 안락사는 현재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시행되는 경우로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한자를 퇴원시키거나, 치료의 중단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좀 더 강한 방법으로 말기 암 환자 등 회복불가능 환자에 대해 독극물이나 가스 투여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현재 논의될 문제는 소극적 안락사가 아닌 적극적 안락사의 합법화 문제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권과 아울러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생존권은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관연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서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존엄하게 죽는 것이 꼭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권리라고 혼동하는 것이다. 죽음의 시점을 앞당기려는 것은 오히려 존엄한 죽음에 어긋나는 것이다. 존엄한 죽음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켰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락사를 꼭 자비로운, 존엄한 죽음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안락사는 이런 기본적인 취지의 오류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그중 하나가 의사의 역할의 문제와 불신의 문제이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손으로 환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의사의 기본 이념에도 크게 벗어나며 환자들에게 의사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 자신의 치료를 해주는 의사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형성될 것이고, 나아가 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고리가 끊어 질 것이다.

또 다른 문제로는 오진이 가능성과 안락사 허용범위 설정의 모호성이다. 현대의 의료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100% 확신을 할 수 없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자연히 오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안락사 허용범위, 최근에 가장 많이 인정하는 것이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고통이 막심한 환자에게 있어서 환자의 동의 아래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환자가 정말 죽기를 바라는지 그 동의가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을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말기 환자가 많은 미국의 한 병원에서 고통이 심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했었다. 질문의 내용은 "당신은 지금 당장 강도를 만난 찔려 죽고 싶습니까?"였다. 응답자들은 전원이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었다. 이 응답자들 속에서 상당수가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들 이였다.

이처럼 인간은 궁극적으로 깊은 내면 속에는 말기 환자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의지가 극심한 고통에 가족들의 힘들어하는 모습에 약해 졌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의성의 무제! 예를 들어 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자식들은 노인이 하루빨리 돌아가시기를 원한다. 그때 노인의 선택은...... 물론 이 예는 극단적인 예에 불가하지만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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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개인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기도 어렵고, 더욱 길어지고 있는 생명경시 풍조를 더 심화 시킬 수 도 있다. 우리는 이제 안락사가 누구를 위한 안락사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존엄한 죽음의 의미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의성 히포크라테스는 "나는 누구에게도 독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비록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더라도- 그런 계획을 제안하지도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토론의 시비를 가리기 전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아야 할 것이다. 생명은 불치병환자나 건강한 사람 모두에게 소중한 것이고 그 어떤 가치보다 더 존중되고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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