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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나치 강제수용소 장면.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3년을 갇혀 있었던 빅터 프랭클은 죽음과 직면한 상황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이 책에 나오는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려는 바는 첫 번째 인생에서 망쳐놓았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는 문장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고전 다시읽기/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페르시아의 권력자가 하인과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갑자기 하인이 비명을 질렀다.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는 거다. 신이 곧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며, 주인에게 도망갈 수 있도록 말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 말을 타자마자 하인은 큰 도시인 테헤란으로 줄행랑을 쳤다. 자신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말이다. 마음을 진정하고 집으로 들어간 주인, 떠나지 않고 있던 죽음의 신과 마주쳤다. 주인은 신에게 따졌다. “왜 우리 하인을 겁주고 그러오?” 그러자 죽음의 신이 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밤 테헤란에서 만나려고 했는데, 그가 아직까지 여기 있어서 놀랐다고 말했을 뿐이었어요.” 오늘 소개할 <죽음의 수용소에서>(원제:Man's Search for Meaning)>에 나오는 이야기이이다.

인생은 덧없다. 발버둥 쳐봐야 우리는 모두 테헤란으로 도망간 하인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허무하게 막을 내릴 세상살이 또한 신산스럽기 그지없다. 계급 같이 굳어져 가는 빈부 격차. 뒤쳐진 사람들은 아득바득 살아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아 절망한다. 경쟁의 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의 삶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선진국일수록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자도 많지 않은가?


시련의 이유 알면 고통 멈춘다

빅터 프랭클은 현대문명의 고질병인 우울, 중독, 막연한 공격성향은 모두 똑같은 원인에서 나온다고 진단한다. 삶에서 별 기대할 게 없다는 절망감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거다. 그는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건강함을 되돌리려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3년간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 곳에서의 체험을 로고테라피의 관점에서 설명한 책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순간, '죄수‘들의 인생은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온몸의 털까지 모두 깎여 나가 버린 채, 번호 매겨진 예비 시체로서 살아갈 뿐이다. 미래도 과거도 없고 고통만 있는 생활이다. 이런 속에서도 과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프랭클은 ‘그렇다.’라고 말한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뺐길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자유를 깨닫는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다. 닥친 고난을 자신을 강하게 하고 가치를 만드는 계기라고 확신한다면, 시련은 오히려 축복이 된다. 아무리 잔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자유만은 빼앗을 수가 없다.

그가 수용소 안에서 치료한 젊은 여성은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운명이 이렇게 엄청난 충격을 준데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 전까지 저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의 만족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대가 혼란하지 않다면 영웅도 태어날 수 없다. 만약 시련이 닥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터다. 이렇듯, “시련의 이유를 알면 고통은 멈춘다.”

인간은 이상과 가치를 위해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존재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 찾기를 포기한 사람은 며칠 못가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증언한다. 반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는다. 인생은 시련과 죽음 없이 완성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나는 나의 고통이 의미 없어질 때가 가장 두렵다.”라고 말했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내 모든 시련은 감내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절대 고통으로 변해 버린다.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의미를 놓아버린 사람에게 과거는 고통이다. 이들은 세월을 한 장 한 장 뜯겨져 나가 결국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달력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돌아올 수 없는 달콤한 추억은 마음을 아리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세월이란 달력 뒷장에다 소중한 사항을 빼꼭히 적어놓고 차곡차곡 쌓아놓은 창고와 같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과거는 오히려 더 행복감을 주는 재산이다.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도록 완성되었다. 더구나 매 순간 순간 내 삶에 소중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오지 않은가?


인생을 두번째로 살듯이 하면…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의미요법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책임감’으로 본다. 로고테라피의 행동강령은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일러준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려는 바는 첫 번째 인생에서 망쳐놓았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즉,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말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이럴 때 실패는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된다. 나아가 프랭클은 자신을 넘어설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병을 만든다. 그러나 자신의 모자람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튼실한 자아를 갖출 수 있다.

프랭클은 남 앞에서 긴장하면 땀이 쏟아져서 고민하던 환자와의 상담사례를 들려준다. 프랭클은 환자의 긴장을 풀어주기는커녕, 이렇게 권했다고 한다. “저 번에는 땀을 한바가지만 흘렸지만, 이번에는 열 바가지 흘리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러자 환자는 땀 흘리기를 멈췄다. 그가 말하는 역설적 의도(paradoxical intention)란 이런 것이다. 콤플렉스는 피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나를 옥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받아드리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 때. 마음의 짐은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백내장에 걸리면 세상은 구름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반면, 녹내장 환자는 빛 주변에서 무지개를 본다. 하지만 건강한 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마음이 건실한 이들도 그렇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남들과 세상에서 진정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거울 속에 내 모습에서 눈을 떼면 그 밖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남들에게 사랑을 주며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라.


연령대별 출세 기준표 넘어서라

프로이드 심리학에서 고통은 좌절된 욕망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랭클에 따르면 긴장과 갈등 없는 상태는 최선이 아니다. 오히려 “긴장은 정신의 웰빙(well being)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인내하는 존재(homo patience)인 인간은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상승하는 과정에 있을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학력, 경력, 재산 등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연령대별 출세 기준표’는 너무도 견고한 탓이다. “이 나이 때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 의미를 찾기 전에 남이 부여한 의미에 치여 삶은 스산해지기 십상이다.

프랭클이 일러주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는 경쟁에 치인 우리의 숨을 틔워 준다. 적어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보다는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아우슈비츠에서도 가능했던 인생 의미 찾기가 지금 내 삶에서 불가능할 것도 없다. 삶의 의미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누구나 공평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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