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 이것 저것 가르치려 안달복달하지 말고 행복한 시간 함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어린 시절 나는 참 무사태평했다. 종종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거나 버스를 타고 무작정 아무데나 싸돌아다녔다. 그 시절의 내 어머니에게 내가 어딨냐고 물었다면 아마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다가, 혹은 교복을 다리다가 “요 근처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요즘 엄마들 기준으로 보면 내 어머니는 ‘어머니 노릇’ 면에서 신통치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얼마나 자주 미아가 됐었는지를 생각하면 거의 아이에게 무관심한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어머니는 우리를 훌륭히 키우셨다. 물론 우리들과 함께 블록 쌓기 놀이를 해주셨다거나 스케이트장·피아노 학원 등으로 우리를 끌고 다녔다는 뜻은 아니다. 어머니는 운전도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계신 곳은 언제나 아늑했다.
요즘 세상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이가 집 밖에서 길을 잃으면 대번에 사회복지사나 경찰이 아이를 데려와 문을 두드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완벽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됐고 얼굴에서 웃음이나 고난의 흔적인 주름을 지워버릴 수 있게 됐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머니들의 유난스러운 자식 키우기 열풍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아동보육 분야의 저명인사 D. W. 위니콧은 “열심히키우는 평범한 엄마”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이제 축구장에서 학교 입학 설명회까지 아이를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니다가 저녁에 녹초가 돼 쓰러지는 수퍼맘이 등장했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아이의 본성이 중요하냐, 양육이 중요하냐를 둘러싼 논란도 한몫했다. 내 어머니가 우리들을 키울 적에 아이들은 태어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다. 세상에는 똑똑한 아이, 착한 아이, 심지어 못된 아이도 있으며 어머니가 해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됐을 무렵엔 사정이 달라졌다. 과학자들은 아이들은 유연한 존재라서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도 원하는 방향으로 양육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다고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는 말라.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아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남들이 사는 만큼은 무리를 해서라도 꼭 구색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자녀 양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엄마들은 대개 자식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다. 아홉달된 자기 아이가 완전한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아홉달짜리 아기의 엄마였을 때는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수십년 전 페미니스트 혁명이 미국을 완전히 탈바꿈시킨 것을 생각하면 이런 광풍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어느 정도 페미니스트 혁명의 소산이기도 하다. 일부 여성들은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런 여성들은 자신의 일할 수 있는 자유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어린 시절의 모든 시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순간이며, 그리고 그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엄마가 무능한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나와 내 친구들은 여자도 평생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첫 세대다. 그만큼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데 체계가 없었다. 육아의 바이블을 쓴 스포크 박사는 1976년 일과 육아를 병행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자신의 책을 고쳐 썼다. 그 두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여성은 아이의 입에서 나온 물질을 어깨에 묻히고 직장 회의에 나온 여성으로 상징화되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관련 책이 나오고 세미나가 열리면서 현대의 어머니는 하나의 직업으로 분류됐다. 집 밖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희생한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임이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 직장 여성들 역시 자신들이 일을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때문에 직장 여성들은 회사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것만큼이나 진지하게 자녀 양육 문제에 접근했다(아버지들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학부모 모임에 참여하고, 아이의 선생님을 만나고, 아이를 수학능력적성시험(SAT) 대비 캠프에 보낼 계획을 짜는 일 등은 직장을 가진 엄마나 그렇지 않은 엄마 모두에게 스트레스다. 사실 이런 일들 중 대부분은 아이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만약 아이가 여섯살 때부터 어머니가 아이 숙제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가르친다면 아이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을 때도 주인의식을 갖고 자랑스워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 실수와 실망을 통해 배우지도 못한다.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조부모가 집을 장만하고 가족을 꾸렸던 나이까지도 젊음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조부모에게는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선생님에게 항의 전화하는 부모가 없었다. 요새 아이들의 집중력이 낮은 것은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들이 아이들을 한시도 가만히 있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주말에 아이들이 운동하기보다는 형제들끼리 셋이서 놀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형제애가 두터워질 것이라고 남들에게 말했고 정말 그랬다. 그러나 사실 나는 경기장 밖에 서서 우리 아이들이 축구 천재라도 되는 양 아이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것보다 집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 셋을 낳았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해줘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맏이는 꽤 어릴 때부터 내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다. 아이가 4학년 때 나는 아이가 그 나이에 맞게 해낸 숙제를 중학생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에게 부담을 주었고 그때 이후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부모들이 도와주어 마치 전문가가 만든 듯한 다른 아이들의 공동 미술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는 내 아이에게 어린 시절 엄마의 양육 방식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내가 대학 입학 원서를 낼 때 나보다 엄마가 더 난리쳤었죠”라고 말했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아이는 “가장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지금 죽으면 나도 내 묘비명에 그렇게 새기고 싶다.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쓰고 몰아붙이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일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는데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리고 숙제를 도와주어 아이가 ‘수’를 받도록 한 옆집 엄마를 따라잡기 위해 아이들에게 계속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게 매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엄마들의 두려움, 자기 불안, 무조건 남이 하는 것만큼 해야 한다는 생각 등은 모두 아이들에게 극복하라고 가르치는 항목들이 아닌가. 내 기억 속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내가 어머니를 웃게 만들었을 때였다. 내 아이들도 나를 웃게 만든다. 그런 행복한 기억은 유아 교육 프로그램이나 미술 과제물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저 시간표일 뿐이다.


 글 : ANNA QUINDLEN 뉴스위크 칼럼니스트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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