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007-01-17 11:28]    

[오마이뉴스 이종필 기자] 1991년 9월17일, 한 서울대 대학원생이 신림동에서 택시에 내려 귀가하려던 도중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 며칠 전 경찰의 무리한 시위진압으로 겨우 1학년이던 신입생을 구속시킨 것에 대한 항의로 서울대 학생들이 인근 파출소를 화염병 시위로 급습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경찰의 주장에 의하면 파출소 안의 경찰들이 다급한 나머지 공중으로 위협사격을 했는데 그것이 길 건너 대학원생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이 조준사격을 하였는지 위협사격을 하였는지가 뜨거운 쟁점 중의 하나였다. 부검을 하고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서울대 물리학과의 한 명망 있는 교수가 일간지에 기고문을 썼다. 총탄의 입사각으로 보아 거의 수평에 가까운 각도로 사격했음이 분명하다는 요지였다.

대학 1학년 과정의 일반물리학을 조금만 배우면 금방 계산할 수 있는 문제이긴 했지만, 매우 민감한 시국사안에 대해 '교수님'께서 직접 일간지에 경찰의 논리를 반박하는 글을 쓴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건만, 그 상식을 터놓고 말하기가 현실에서는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절감했다. 그리고 그 쉽지 않은 일을 결행한 그 분의 용기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많은 고민을 던져줬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은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과학적 신념을 지키는 것이 종교적 혹은 이념적 신념을 지키는 것에 비할 바 아니겠지만, 갈릴레이로부터 근대 과학이 시작된 이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기가 항상 쉽지만은 않았다.

전직 수학교수가 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고 현직 판사를 습격한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발단이 되었던 1995년 입시문제를 둘러싼 사건은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아 보인다.

문제가 된 그 수학II의 7번을 한참 들여다보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구해서야 겨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지만, 이미 대학당국이 그 오류를 자인했고 국내외의 저명한 수학자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그 문제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아마 전직교수의 주장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 원래 문제에 하자가 없었다면 이 사건이 이만큼 커지지 않았을 게다.

그러니까, 그 전직교수는 틀린 문제를 두고서 틀렸다고 주장한 것이 화가 된 셈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1+1=3이 틀렸다고 말한 것이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3차원 벡터에 관한 그 문제가 교황시절의 지동설만큼이나 '코페르니쿠스적 이슈'일리도 없거니와 조준사격이냐 위협사격이냐의 문제만큼이나 애매하고 민감하지도 않은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혹은 학자적 양심을 걸고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힘겹다. 사회의 권위가 정해 놓은 논리가 아니면 이단으로 몰아 마녀사냥을 하던 시절은 한참이나 지났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우리는 이 끝없는 화형의 행렬을 보아왔다.

2005년 말의 황우석 사태는 그 정점이었다. 한 영웅적 과학자의 권위와 <사이언스>의 권위가 수많은 젊은 과학자들의 양심을 짓밟았다. 과학이 가장 성공한 학문으로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권위에 대한 그 끝없는 도전 때문이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양심이 설득될 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도록 수년간 교육받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그들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게 왜 어려운지

오랜 기간 정답만을 강요받은 우리들에게는 익숙하지가 않지만, 과학 활동의 과정은 오답의 연속이고 시행착오의 반복이며 끝없는 실패 그 자체에 오히려 가깝다. 그래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당신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며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선배도 스승도 <네이처>나 <사이언스>도 예외일 수 없으며 심지어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시험 문제를 잘못 출제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거기에 대해 "당신은 틀렸다"는 주장 또한 일상적으로 늘 우리 곁에 붙어 다닌다. 그 "틀렸다"는 주장 또한 틀렸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이 나에게 엄청난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고 인생이 어그러지고 있으며, 사회에 무지막지한 죄를 지은 것처럼 교육시켜 온 우리 사회 전체가 문제라면 더 문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과학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거부한다면 그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과학에서조차 끝없이 이런 논란이 일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큰 목소리'가 합리와 이성을 대체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서울대 김민수 교수는 그 선배 교수들의 친일행위라는 '팩트'를 다른 데서 재인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수년간 고초를 겪었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을 북한 주도의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 것 때문에 불구속 기소까지 되었다. '통일전쟁'이라는 말 자체는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사실판단에 대한 언급임에도 이를 사법처리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마녀사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유엔 권리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가보안법 남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만약 강 교수가 '적화'통일전쟁이라고 했다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었을까.

더 나아가, 그가 북한주도의 통일전쟁은 "좋은 것"이었다고 가치판단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사법처리 하는 것은, 예컨대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가치판단을 사법처리하지 않은 것에 견주어(법리적으로는 국가보안법상 일본이 반국가단체가 아니라서 문제가 없겠지만) 상식적으로는 형평성에 크게 어긋난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한 과학자에게 선처를

우리 사회가 정말로 건강하다면 일제와 북한을 찬양하는 그런 주장들이 나올 때마다 압도적이면서 훨씬 더 그럴듯한 자료와 근거들로 반박해서 무력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당신은 틀렸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우월적 권력으로 핍박한다면 그 사회는 아직 과학의 세례를 받지 못한 야만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된다.

과학자가 "당신은 틀렸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과학자로서의 본능이요 양심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명과 국가 사법체계의 근간을 위협한 행위가 어찌 중죄가 아닐까마는, 자신의 과학자로서의 양심이 지켜지지 않고 본능이 짓밟히는 참담함을 사법당국이 조금은 헤아려 김 전 교수를 선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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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기자소개 :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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